역대 발해왕의 계보 대조영 건국부터 차례를 살펴보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발해는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패하면서 멸망한 후 당시 고구려 유민(지방 호족 중심)은 당나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고성지/이정기/대조연 집안이 이때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요동지역을 비롯한 11개 성에서는 고구려의 부흥을 꾀할 정도로 아직 건재한 세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 유생들의 힘과 소망이 처음으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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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거란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이 랴오닝성을 벗어나 만주 동부지역으로 가서 발해를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해는 확실한 한국의 옛 역사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을 비롯한 러시아 등의 나라에서는 발해를 아직 시각이 다른 경향이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발해 건국 당시 대조영이 당나라에 패전한 척척족을 흡수한 것을 다르게 보고 발해를 척척국이라고 교과서에 표기하기도 합니다.
러시아도 1980년대부터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의 유민이고 피지배층이 영락했다는 설에 따라 중국의 역사인식을 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한국은 일본의 연구 성과 등을 인정해 기존에는 지배층만이 고구려인임을 인정했지만,
이후에는 피지배층도 대부분 고구려인이라는 주장으로 바꿨습니다.
예전에 고구려조차 함박갈인이 많았고, 나중에 고구려화 된 것처럼 발해를 이끈 집단이 고구려인이었고, 최치원도 옛 고구려가 현재 발해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상식적으로 고구려인들이 살던 곳 대부분이 발해가 되었는데, 이 사람들을 고구려와는 다른 갈취국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락갈국이 아닌 한국의 옛 나라인 발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지금부터 발해왕의 계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해왕의 계보, 대수/시호/휘/재위기간
발해 1대 왕, 고왕, 대조영 698년 ~ 719년
발해는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패해 멸망한 이후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통일신라도 평양 이남을 점령했고 당나라도 만주지역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란족과 고구려 유민, 황태갈족 등이 섞여 살았습니다.
그 후 98년 당나라에 패전한 황소족을 흡수한 대조영이 당군을 몰아내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후 발해의 대조영이 나라를 발해 건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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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부터 발해는 아니었는데요. 이후 고왕 대조영은 국호를 당이 정한 이름인 대진국에서 발해로 고쳤습니다.
발해 2대 왕 무왕대 무예 719년 ~ 737년
무왕은 고왕의 아들로 고구려 영토를 복원하기 위해 영토 확장에 주력했습니다.
일본과 수교하여 발해를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
이후 무왕은 흑수유족 정벌에 군사를 일으키려 하자 동생 대문예가 반대하자 분노했고 대문예는 당나라로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무왕은 장문희에게 당나라 등주를 함락시키고 등주를 폐허로 만들어 버립니다.
발해 3대 왕 문왕대 흠무 737년 ~ 793년
문왕은 무왕의 아들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당나라와 신라 등과 화친을 맺었습니다.
또한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또 도쿄용원부로 상경용천부로 옮기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 나라가 상당히 경제적/정치적으로 안정과 풍요로움이 있었습니다.
발해 4대 왕 폐왕 또는 원의왕 793년
폐왕은 문왕의 손자 대조영의 손자인데요?
폐왕시대의 발해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왕위 계승에 정통성을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발해 5대 왕 대화녀 793년 ~ 794년
성왕은 문왕의 손자로서 수도를 도쿄 용원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긴 것 외에는 재위기간도 짧아 큰 업적은 없습니다.
발해 6대 왕 강왕대 숭린 794년 ~ 809년
대숭린은 성왕의 숙부로서 당&일본 등과 문물교류를 활발히 하여 외교적으로 자주 왕래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발해 7대 왕, 정왕, 대원유 809년 ~ 812년
강왕의 아들인 정왕은 별다른 업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발해 8대 왕희왕대언 812년 ~ 817년
정왕의 동생인 희왕은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신문물과 여러 제도를 수용하고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여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 9대 왕간왕 대명충(明忠) 817년 ~ 818년
간왕은 공주왕의 동생으로서 별다른 업적이 없네요.
발해 10대 왕, 선왕, 대인수 818년 ~ 830년
선왕은 고왕의 동생인 대야발의 증손자인데요? 또한 간왕의 종부이기도 합니다.
약화된 왕권과 쇠퇴한 발해를 다시 부흥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행정구역 정비에 힘썼다.
발해 11대 이진왕대 이진 830년 ~ 857년
선왕의 손자 대신덕의 아들인 이진왕은 본격적으로 해동성국이 아닌 쇠퇴하고 있는 발해의 시작을 알린 왕입니다.
발해 12대 왕 대건황 857년 ~ 871년
대건황은 대이진의 동생으로 처왕건황왕이라고도 불립니다.
이진왕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 왕이 된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 할 업적은 없습니다.
발해 13대 천황 대현석 871년 ~ 894년
경왕은 대건황의 손자로서 당나라 의종 때 당나라에 들어와 국교를 강화했습니다.
일본 등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교류하였습니다.
나라는 귀족들의 싸움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발해 14대 위해왕의 대위 894년? ~ 906년
위해왕은 한동안 발해왕계에서 빠져 나와 존재를 몰랐는데요. 김육불에 의해 존재가 밝혀졌습니다.
발해 15대 애왕 인선왕이라고도 함, 대인선 906년 ~ 926년
애왕은 발해의 마지막 왕으로 거란이 수도 상경 용천부를 포위하고 백성들에게 동원령을 내렸지만 백성들은 고려로 도망쳤습니다.
이에 애왕은 성문을 열고 신하들과 함께 거란 장군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애왕에 의해 발해왕의 계보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출처 : 네이버 공시정보 – 발해왕계보도